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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1-18 '할례와 은혜'

설교방/새벽 설교

by JJ family 2023. 2. 22. 22:37

본문

2021년 9월 14일 새벽예배  (289/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서론

어떠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원인과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야 같은 실수나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도 우리나라나 중국.. 미국 등의 나라에서 태풍의 영향에 의해 엄청난 비가 내렸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수 피해를 당해서 대피하기도 하고, 부상자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사람의 잘못에 의한 인재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축대가 무너지는 탓에 흙더미가 밀려와서 인근 거주 지역을 덮어버린다거나.. 강한 비바람으로 인해 다리와 도로가 유실되던지 하는 것이지요. 처음 건설 때에, 부실공사로 진행되어서 추가 피해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련 규정을 잘 준수하며, 공사가 되어지도록 철저한 감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직 썩어질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로 자기 자신을 항상 점검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시며..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1절에서 16절로.. 할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0절 까지.. 율법과 복음의 관계와 관련해서, 특별히 복음에 대해 변증하던 바울이었습니다. 이제는 안부 인사나 축복을 기원하며 서신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갑자기 할례라는 민감하고도 새로운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할례가 구약의 모든 율법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기에.. 지금까지 나누었던 내용들을 요약 정리하는 차원에서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혹여라도 의문이나 트집이 생길만한 그 어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 역시 바울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할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할례의 첫 시작은 창세기 17장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자손 대대로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언약의 증표로서 할례를 행하도록 하신 것이지요. 할례를 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매일 수차례씩 작은 볼일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기억이라 함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답게, 구별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창세기 17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주신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완전한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완전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타밈,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바치게 되는, 흠이 없는 동물을 표현할 때에 쓰였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도덕적으로 성실하고.. 깨끗한 자로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기에.. 이 말씀을 들었을 당시 아브라함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또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기근이 왔을 때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벗어났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을 두 번이나 행하기도 했었지요. 이외에도 믿음의 첫 세대로써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이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용납하고..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기 위한 통로로써 택함을 받은 그 순간부터는.. 지난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할례의 의미는 점점 변질되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른 이방 민족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의식이 되었던 것이지요. 또한 할례 그 자체가 일종의 제도화.. 형식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판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난지 8일째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할례를 행하기 위해, 안식일을 어기게 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며,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조차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명령하셨지요.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안식일 교육을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할례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선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유지시켜준다 믿어서 그런 것이었겠지요.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만 남은 할례였다고는 해도, 그것을 열심히 지켰던 것처럼.. 율법도 열심히 지켰다면, 그다지 문제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몸부림치던 중에.. 완전히 준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 역시 형식화 시키다 보니.. 부정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세부 조항들을 만들어 놓고는.. 율법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지요. 율법의 의미를 훼손하고 껍데기만 남게 한 것입니다. 언제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미 예수님 시대 때에는.. 율법주의만 있었을 뿐, 실제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옳아 맬 때만 사용되어졌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역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정작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강요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되어졌다는 사실 외에.. 그 어떠한 것도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지요.

끝으로 사도 바울은 본문 후반부인 17절과 18절에서.. 짧게 마지막 당부의 말과 축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앞에서 자신이 강하게 논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문제들로, 자신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고.. 자신이 전한 복음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서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함으로써 복음을 위해 수고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열심히 헌신하며, 수고한 가운데 전한 복음이.. 참되고 유일한 진리임을 강조하면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안내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현재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시고, 양화진 같은 묘역에 묻히기도 하셨지요. 또한, 당시에 복음을 받아들이셨던 우리의 선조들은..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순교하면서까지 신앙을 유지하시고 후대에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선배들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며,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잘 전달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던 율법주의자들은..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권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따르도록 한 것을, 다른 유대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외지인으로서 이렇다 할 경제력이나 권력 같은 것이 없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이용해서, 교회 안에서 일종의 기득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외적인 형식이 아예 무시되거나 간소화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본질과 의도가 파괴되는 것이라면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어떻습니까? 내적이고 영적인 부분에 더욱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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