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6일 새벽예배 (새 447장 /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서론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입니다. 자신에게는 굉장히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에 사용하는 말이지요. 이중적인 태도의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 연예인.. CEO 등, 매스컴에서 이상한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종종 하게 되는 잘못이나 실수이기도 합니다. 무슨 사정이 있건 잘못했으면 일단 용서를 빌던지.. 사과를 하던지 해야 하는데,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은 깍아 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보다 강도 높은 기준과 잣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해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바라기는 오늘 하루도 복음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기에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게바’라고도 불리는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참 식사 중에.. 야고보가 보낸 할례자들이 왔었을 때에, 하던 식사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혹여라도 유대인으로 이방인들과 겸상한 것에 대해 비난과 정죄를 받을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때에는..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었고, 승천하시기 직전.. 복음 전파에 대한 당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면서, 로마 전역으로 도피를 하게 되었지요. 전국 곳곳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정착하며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그들의 구별된 삶을 통해.. 현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문제는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려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정책이나 계획이 애초에 없었다 보니까.. 비유대인 개종자들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제 본문을 가지고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언급하신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 후에 열렸던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통해서 최종 결론이 나게 되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할 것 없이.. 구원받게 됨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정확한 시기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결정이 있고 나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기 전이었습니다. 때문에 베드로가 됐건 누가 됐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대인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리를 피했으니.. 함께 식사를 하던 이방인들이나, 나중에라도 그것을 알게 된 유대인들은 당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면,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사정이나 이유는 있었겠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와 열 두 제자 중의 한 명인 요한과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초대교황으로 추대하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중요 인물이.. 모두가 합의를 한 사항에 대해서, 주님과 복음 앞에 떳떳하게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었겠습니까? 이것이 빌미되어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또 다른 논쟁이나 시험거리를 야기 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폭발적인 성장과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 범국가적인 신앙 공동체의 수장이었던 만큼.. 일거수일투족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부분에 대해 인식하고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신실한 주의 종 바나바에게도 하나의 시험거리가 된 것을 보면.. 베드로의 행동은 책망받기 마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을 언급한 것에 대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위치를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 봬도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희석되는 것이지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본문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라고 하는 ‘이신칭의’ 사상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 사도 베드로의 위치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본질과 핵심보다 우선하지는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일화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신칭의’ 사상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유대주의로 후퇴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어떠한 사건이 떠오르지는 않으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 가셨을 때에.. 로마 법정의 뜰에 있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건과 굉장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때나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건에서나..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반응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효화시키고..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표현들을 고려해 볼 때.. 어떠한 관점에서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평가에 더욱 집중했던 사울 왕 같은 모습이 그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여전히 실수투성이고, 바울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역시 깨어있지 않고.. 복음에 붙잡혀 있지 않으면,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도 미혹 당하지 않고, 믿음과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인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굉장한 고백을 합니다. 짧게 요약하면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삶’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폈던 베드로의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이신칭의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자신의 자아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야함을 말하고 있는 전개 방식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자아로 살아가고자 할 때에는.. 본인의 의가 드러나려고 하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 윤리, 도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는 것이지요. 반면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은.. 그분께서 온전히 드러나시고, 영광 받으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일.. 지금도, 앞으로도 하실 일.. 그러니까 온전히 복음만 증거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으로 살아가가고 계십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이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3:10-18 '오직 믿음으로' (0) | 2023.02.11 |
---|---|
갈라디아서 3:19-29 '율법보다 복음' (1) | 2023.02.11 |
시편 71:17-24 '하나님의 교훈' (0) | 2023.01.26 |
시편 72:1-20 '진정한 통치자' (1) | 2023.01.26 |
시편 68:19-35 '100퍼센트 승리 비법' (0) | 2023.01.21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