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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 교회'

설교방/새벽 설교

by JJ family 2019. 10. 8. 18:09

본문

2019년 7월 19일 새벽설교

 

내용 요약

요한계시록 3장은 2장부터 다루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나머지 세 개의 교회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각 교회의 명칭은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칭찬과 질책을 함께 받았고, 빌라델비아는 2장의 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꾸중만 듣게 된 교회이지요.

간략하게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먼저 1절부터 6절까지는 사데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다라는 질책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황금의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화려하고 부유했던 도시였지만..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워서 밤이 없는 도시와 같았지만.. 속 빈 강정, 빈 껍데기와 같았던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었던 것이지요. 겉만 번지르르할 뿐, 그들의 내면과 신앙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그곳의 문화에 젖어들지 않고..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13절까지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는 가난하고.. 비천하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무능한 교회였습니다. 사실 포도 재배의 중심지이고..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어서 가난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 배경에는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것보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무리들의 모임인 교회를 더욱 싫어했는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유대인들에 의한 환난과 고통이 더욱 심했던 곳입니다. 그러함에도 믿음을 지켰으니,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지요.

끝으로 14절 이하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꾸지람만 받은 교회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으로 인해 질책만 듣게 된 것입니다. 믿음과 신앙에 대해,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마치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지요.

본론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모습은 무엇인지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실행에 옮겨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보통 우유부단한 남자 아이들에게.. 사내다움을 가르칠 때에 흔히들 사용했던 문구였습니다. 저도 한 때는 소심한 트리플 A형이었어서..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표현들이 거부감을 주는 부분들이 있어서 거의 사용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교훈을 주는 명언 같을 때가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 이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는 보통 진실되다, 진리라는 표현으로 번역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온전한 순종과 충성을 하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어떠한 말씀을 하시려는가? 함께 본문 15절과 16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라오디게아의 지리적 환경적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으로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맞은편에는 10km 지점 즈음에 히에라볼리가 있고, 14km 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털 위주의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브루기아 가루'라 알려진 안약이 유명했고,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단점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이용해 항상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지요. 가장 가까운 곳인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물을 공급 받았는데.. 히에라볼리는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뜨거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골로새로부터는 지하수를 공급받았습니다. 여기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의 지역에서 10km 남짓의 수로를 통과해서 오는 동안.. 온천수와 지하수가 라오디게아에 도착해서 공급되어질 때까지, 그 온도가 유지되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지요. 온천수는 온도가 식어서 뜨뜻미지근해졌을 것이고.. 지하수는 태양열에 의해 수로가 뜨거워져서, 시원함은 사라지고.. 이도저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신앙이 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결혼하시기 전에.. 지금의 배우자 분들과 연애 기간이 있으셨을 텐데.. 그때를 잠시 떠올리시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됐건, 여자가 됐건.. 이성 친구를 사귀게 되었을 때에, 그 관계가 지속되려면.. 시쳇말로 밀당이 필요합니다. 잘 해주었다가, 못 해주었다가.. 그런 것이지요. 한때는 차도남, 차도녀가 인기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하는데.. 유독 냉정한 척.. 나쁜 사람인척.. 그런 이미지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츤데레라는 것도 있습니다. 상당히 불친절하고,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지는데.. 은근슬쩍 챙겨주면, 그것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애경험이 없거나..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유부단함입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휴일에 어디론가 놀러가고자 할 때에..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확실히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만 지체하게 되면, 상대방을 사랑하는지 어쩐지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차이게 되는 것이지요.

미지근한 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뜻하고 뜨거운 것을 좋아하거나.. 뼛속 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시원한 것을 찾게 되지요. 미지근한 커피.. 미지근한 콜라..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지근한 물은 속을 울렁거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속이 좋지 않아서, 구토를 하려고 할 때에.. 미지근한 물을 마시게 하지요.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의미인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한 도시였기에, 그러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지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교만에 대해 질책하고 계십니다. 먼저 본문 17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여기에서는 상당히 반어적인 표현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머나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상업과 금융업으로 상당히 부요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유명한 안약의 제조지였고.. 의학교도 있었습니다. 주로 양털을 이용한 의류업으로도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선망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자신들의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인해 굳이 열심히 믿지 않아도 부자로 살고 있는데.. 적당히 구원받을 수 있을 정도만 믿어도 충분하다.’라는 식의 생각들.. 예수님이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되는 삶과 같은 교만함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에서는 영적 무관심에 대해 질책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을 통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를 대표하는 양털은 검은 색으로 된 것인데,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의미하지요.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것은 영적인 시각 장애를 치유하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적인 성공.. 부의 축적.. 웰빙.. 풍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 이와 같이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중하지 말고,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질책하시고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이켜서 예수님과 동행하길 원하시는 것이지요. 함께 본문 20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지금도 그분의 특별하신 인내와 사랑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 말씀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친밀한 교제를 나눌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2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왕적인 통치를 공유 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를 질책하신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미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환경적 요인이 그러했다지만.. 예수님께서 내 삶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셔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대충 신앙생활하고 하고 싶은 데로 살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무사 안일과 교만함.. 세상의 문화를 즐기고 물질적인 것에 안정감을 누리려는 생각에, 영적인 것에는 점점 무감각해지는 모습들..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비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이곳 베트남에 와서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한국에서 있었을 때에 비해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같지 않습니까?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모습.. 우리 가족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성도가 그럴 수도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지 않으면 토해낼 것이고, 나를 영접하면 함께 보좌에 앉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적당히 세상에 발을 걸치고..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생활 해도 괜찮다. 그것이 지혜다.’라는 생각은 사탄이 주는 거짓 메시지입니다. 결국에는 토해냄을 당할 확률이 99퍼센트입니다. 바라기는 겸손함과 영적 분별력으로.. 예수님께 충성됨으로..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칭찬만 받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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