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8일 새벽예배 (새 216장 / 성자의 귀한 몸)
본론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동문으로 들어가 강력하게 임재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며 그들을 돌보시는 진정한 왕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가 만물을 소성시키고.. 이로 인해 백성들은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 지파에 따라 땅을 분배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 깊게 우리가 깨달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회복의 역사와 그 은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진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범죄함이나, 사단의 방해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멀어진 하나님과의 거리를 다시금 가깝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그러했었지요. 그들이 왜 앗수르나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생겼겠습니까? 그 이전에도 무엇 때문에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고 어려운 상황들이 펼쳐졌습니까? 세상의 기준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한 것을 원인으로 판단하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이었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심판과 징계를 주신 것인데.. 그 이후엔 반드시 회복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심판 다음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있었고.. 그제서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이든 육적이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친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13절과 1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는 이 경계선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몫이니라 내가 옛적에 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 너희는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에스겔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그들에게 임해야 할 최종적인 하나님의 회복은 당연히 영토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의 그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줄 곳으로 언약하신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새 시대를 맞이하여 약속의 땅에 거주하게 될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하시는 것이지요. 특별히 방금 읽었던 본문 말씀에서는 땅 분배의 원칙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강조된 원칙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경계를 정해 주고 계시다는 것과 땅 분배의 대상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처음 땅 분배를 했던 여호수아 때와는 그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분배의 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에는 각 지파의 대표들이 구성되어 땅을 그리고.. 그려진 종이를 찢어서 제비뽑기를 했었습니다. 얼핏 같은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땅 분배를 하는 것이니 만큼.. 공정해야 할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불공평한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지파에는 두 몫을 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편애하시는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하는 본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야곱이 죽을 때..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기 독립된 지파가 될 것임을 약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너무도 사랑해서 레아의 자녀였던 장남 르우벤에게 장자의 권리를 주지 않고.. 요셉에게 주었는가에 대한 의문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이유는.. 르우벤의 범죄함 때문이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동침을 하였습니다. 율법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 중의 하나인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나게 한 것이지요. 이 범죄 때문에 르우벤의 장자 권리가 요셉에게로 가게 된 것입니다. 함께 역대상 5장 1절과 2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와 같은 사건을 아버지였던 야곱도 알고,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요셉이 획득하여 다른 형제들보다 많은 두 몫의 땅을, 여호수아 때와 앞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때에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5절부터 20절까지에서 다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경계는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회복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 면면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크고 넓으며,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던 솔로몬 왕 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는 선대 왕이었던 다윗 왕의 영향력과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은 솔로몬의 영향력이 시너지 효과를 내서.. 역대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도.. 문화적인 수준도 상당히 높았었을 때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약 시대에 와서도.. 하루 빨리 그 때 그 영광을 되찾게 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도, 단지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그들이 꿈꾸고 소망하면서도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가장 영광의 때로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또는 회복시키실 때에.. 고작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숨통이 트이는 정도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택한 자녀들과 백성들에게 주시는 회복의 역사는 가장 영화롭고 최고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간혹.. 우리의 수준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든.. 삶의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든.. ‘이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라고 한계를 지으면서, 실제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그 수준에 도달하면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수준이 아닙니다. 성막 시대로 예를 든다면, 성막 뜰의 번제단에서 제물이 죽고,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준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지성소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저와 갈등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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