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27 새벽 설교 (새 321장 / 날 대속하신 예수께)
본론
오늘의 본문은 저와 여러분이 익히 잘 아는 바울의 회심사건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이 바뀐 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이지요. 많은 분들이 오늘의 본문에 대해 바울이 회심한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저는 이 새벽에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의 관점에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께서 왜 바울을 택하셨을까?’였습니다. 단순히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고, 그러면서도 로마인의 신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유다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지 이미 60년도 훨씬 지났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중에는 바울보다 나은 조건의 유대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택하였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마음은 ‘열정’이라는 두 단어였습니다. 바울은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적인 전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이전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 1절과 2절이 그 근거입니다. 9장 1절과 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조건 예루살렘으로 잡아들일 수 있는 공문을 요청하였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점은 ‘여전히’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이 당시의 바울에게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라는 표현은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데반 집사가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때, 단 하나의 돌도 던지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사도행전의 저자가 잘못 묘사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좀 더 말씀을 묵상해보면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7장 58절의 말씀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하는 자리에 우연찮게 바울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증인들은 스데반의 모든 설교를 듣고,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죽은 스데반을, 회심하기 전의 바울 앞에 둔 것은 둘 곳이 없어 그냥 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가 이 일을 일으킨 주모자 내지 배후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려 한 것도, 그 전에 8장 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둔 것’도, 스데반의 설교에 찔림을 받았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과 구약의 내용을 똑같이 믿고 있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사실 바울이 이때 이러한 일을 하려 한 것도, 그러한 혼란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옥에 가두거나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즉결 처형하는 공문을 작성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회심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배워오고 믿어왔던 절대적인 진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모든 혼란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헌신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열정을 가진 바울을 그냥 이대로 지옥에 가게끔 하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그의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성경의 잘못된 점을 공격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 이후로는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어, 안티 기독교인에서 열정적인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안 믿겨지면 그냥 있어도 되는데, 굳이 비판할 증거를 찾겠다고 열정적으로 용쓰다가 결국엔 회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은 열정적인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부르시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 16절을 보시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해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뜨겁거나 차갑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뜨거운 것은 열정적인 것이고, 차가운 것은 냉혈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열정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뜨거운 음식은 몸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차가운 것은 요즘같이 더운 여름 날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요. 개인의 성향이나 은사에 따라 어느 한 쪽을 택하여, 그것을 극대화시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것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입맛을 버리게 하고..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 때에, 옆에서 궁시렁궁시렁 불평불만과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과 같은 것이지요. 한 공동체의 암적인 존재.. 충치 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열정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지근한 사람입니까? 이 새벽을 깨우고 나오신 정도라면, 열정적인 성도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만족하는 수준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열정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에서는 ‘홀연히 빛만 비추고, 소리가 들렸다’고 얘기하지만, 사도행전 26장 13절부터 보시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섰을 때에 오늘 본문에 대한 사건을 간증하면서 19절에 ‘하늘에서 보이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주의 음성을 들은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까지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두 가지 상황을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는 바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입니다. 환상은 바울만 보았겠지만, 주의 음성은 같이 가던 사람들도 들었다고 본문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도 함께 회심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만 관심 있었고,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셔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만약 그랬을 것 같으면,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주의 음성조차 들을 수 없었어야 했습니다. 그냥 바울 혼자서만 환상을 보고, 주의 음성을 들었어야 합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미쳤나?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들이려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하면서 바울을 떠나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의 음성도 듣고, 갑자기 바울이 보지 못하게 된 것도 알았고, 무언가 바울이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뿐만 아니라 동행했던 사람들에게도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갑자기 볼 수 없게 된 바울을 마을까지 데리고 가도록 하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주된 목적은 바울에게 있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을 버려두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근한 예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애굽의 모든 신들을 벌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애굽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사람들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12장 38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수많은 잡족이 함께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민족 외의 다른 민족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도 주위의 가족.. 친구.. 동료 등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 달라진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해 성경학교의 주제처럼, 우리는 각자의 삶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또 다른 차원입니다.
주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본 바울의 부르심의 사건 속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3일 동안 바울의 눈을 가리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3일 동안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것이 꿈이 아닌 실재 일어난 사건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혹시라도 눈을 떴어도 볼 수 없게 된 일이 없었다면, 바울은 그냥 한 낮의 꿈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는 일에 있어서 무언가 찝찝한 일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겠지요. 인간의 성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한 사람을 택하시고 주의 일꾼을 삼으심에 있어서 모든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이러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을 지금처럼 믿고 섬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모태 신앙도 있을 것이고.. 동료나 친구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엉겁결에.. 우연찮게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믿게 되어 지금까지 오게 된 것처럼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성격과 성향에 맞게 인도해 오신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부르심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하기로 하였을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부르심을 좇아 중국 천진으로 선교하러 갔었을 때.. 그 때만 해도 제 안에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최근 들어서는 그 열정이 줄어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 말씀을 설교하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묵상하면서, 제 안에 식어져 가는 열정을 회복시켜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정적인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신 이유도.. 다혈질에 성격이 급하여 실수를 많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것도.. 모두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신앙적으로 침체기에 빠져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계신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묵상하시며, 다시금 열정을 회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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