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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9:1-9 '하나님 찬양의 이유'

설교방/새벽 설교

by JJ family 2019. 6. 17. 20:05

본문

2013. 5.30  새벽 설교 (338/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본론

오늘 읽으신 시편 149편은, 146편부터 시작되는 할렐루야 시편 가운데 4번째 것으로, 그 주제는 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1절 말씀에서 우리는 2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새 노래로 찬양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노래를 작사, 작곡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만난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보다 더 작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경험하고.. 성경을 연구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티끌보다 더 작을 것입니다. 혹시 난 그래도 수 십 년 동안 신앙생활 해 와서 그래도 좀 많이 아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 이 삼십여 명이 모여 계신데, 각자가 만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같거나 비슷한 부분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부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인 즉슨,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기독교 인구가 15억에서 20억 가량 되는데, 그들이 만난 하나님이 모두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과장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모습이 최소 20억 가지 이상은 된다는 것이지요. 성경이 쓰여진 이래로 수많은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글을 쓰고, 책으로 냈습니다. 그 일들은 지금 현재도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모두 다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각자는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면들을 만나고 경험해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날마다 새롭고..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하나님.. 나에게 익숙한 하나님.. 그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특별히 3절 말씀을 보시면, 복음성가가 됐든.. 찬송가가 됐든.. 늘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약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성경에서는 이것의 정확한 의미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그를 찬양할지어다라는 부분이 ‘making melody to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를 위한 멜로디를 만들어라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작사, 작곡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의 수준에 맞게 적용해 본다면, 내가 늘 즐겨 부르는 찬양이 아닌, 새로 나온 찬양.. 잘 알지 못했던 찬양을 배워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앞의 새 노래로 찬양하라는 말씀과도 연결이 됩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찬양하는 것에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직접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곡을 만든 것을 따라 부르면, 우리는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새로운 찬양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에 얻는 일석이조의 유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즐겨 부르는 찬양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즐겨 부르는 찬양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날마다 즐겨 부르는 찬양과 함께 새로운 찬양을 배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지요. 바라기는 최소한 1주일의 1곡씩이라도 새로운 찬양을 배우시고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여러분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만나보지 못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1절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모였을 때에 해야 하는 일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의 흉을 본다거나.. 특별한 내용이 없이 수다를 떤다거나.. 그러한 것들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런 것을 아예 안 하는 것은 힘들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이면 몇 가지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먼저, 랍비나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사람이 성경 말씀을 낭독하고, 그것을 해석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일들을 하셨음이 성경에 수 차례나 기록되어 있지요. 모여서 기도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루 세 번 정해진 기도 시간에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두 명 정도의 성도들이 앞으로 나와 서로 번갈아가며, 자신이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여호와는 인자하신 분이십니다!”라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이 여호와는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식으로 번갈아가며 선포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둘 중에 한 사람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또 나와서 그것을 이어가게 됩니다. 실제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예배 문화가 전제된 것입니다. 사실 6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이 시편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고, 그 뒤로 계속해서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는 식민통치 시대에 쓰여진 시편인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6절에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절에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절에 왕들은 사슬로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9절에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등의 표현이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이 시편이 쓰여진 유대 민족의 상황이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1절에서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라고 명령형으로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5절의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라는 말씀도 이와 맥락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내가 만난 상황이.. 너무도 힘들고 어려워 쓰러질 것 같아도,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멈추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령 지금의 환경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서 탄식조차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6절 말씀 이후에 나오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하나님께서 추후에 직접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05절에서 7절 말씀을 보시면, 앗수르 제국이 멸망당하는 이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앗수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마치 국력이 강해서 그런 것으로 착각하여 과도한 욕심을 부린 것입니다. 때문에 그로 인한 심판을 받은 것이지요.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괴롭혔던 바벨론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이방 국가들이 결국엔 멸망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운 상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의 것도 있지만,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로 오는 것도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통해 하나님의 징계가 올 경우, 하나님께서 정하신 값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준을 넘어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훈련의 목적으로 사용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새로운 노래로 찬양해야 하는 이유..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것에 좌지우지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이유.. 그것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본문 2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그가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4절에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은 것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그저 당신의 백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다가 우리를 구원하시어 아름답게 하신다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난 지금 몹시 힘들고 어려우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니까.. 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너무나도 교만한 모습인 것이지요. 비록 지금 나의 상황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처럼 고난과 역경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있는 모습 그대로를 기뻐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 의무를 이행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모태신앙이 됐든, 그렇지 않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의해 기쁨이 넘쳐나는 것이지요.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다른 사람이 보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여 지는 것을 알면서도, 온 종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원래의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고..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워 불평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한 번으로 끝냈기 때문인 것이지요. 잠깐 천국을 경험해 본 것을 전부로 여기고, 그 만남.. 그 경험을 지속하려고 노력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힘들고 어렵게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조정하시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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