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서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료 기술이 과거에 비해 월등히 발달해서 그렇지.. 중세 시대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발달된 의료 수준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코로나가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페스트는 1347에서 1351년까지 3년 동안 2천 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코로나는 전세계적으로 확진자 인원만 9천 7백 5십 만 명 정도입니다. 조만간 1억 명이 넘게 될 것인데.. 전 세계 인구를 75억이라고 한다면, 75명 중에 1명 꼴로 코로나 감염자라는 얘기가 됩니다. 사망자 숫자만 하더라도.. 이미 200만 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열심히 개인과 국가적 방역을 실시하고.. 했는데도 1년 동안 이정도인데, 아무리 백신이 개발되었다고는 하더라도.. 페스트 때처럼 앞으로 2년이 더 지나서 3년을 채우면, 피해의 정도가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파급력과 전염성 때문에.. 어쩌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에 감염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코로나 덕분에 그동안 너무도 당연시 여기던 일상생활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몇 년 전부터 세상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던 4차 산업혁명의 콘텐츠들을 부지불식간에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교류 방식은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비대면과 랜선을 통한 교류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난해에 이미 몇 차례나 경험했다시피.. 예배의 방법도,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방식의 예배가 더 권장되고.. 선호하게 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을 유지해야 하는가.. ‘슬기로운 신앙생활’ 시리즈로 오늘부터 8회에 걸쳐 함께 나누어 볼 것인데, 첫 주제는 ‘예배’입니다.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배울 정도로 매우 중요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짧은 시간 모든 것을 다루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핵심적인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그동안 하나님을 믿고 나서 드린 예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예배가 있으셨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때가 언제였고.. 어떠한 은혜가 있었는지 서로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본론
예배에 대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선 우리는 예배의 역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수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예배가 어떻게 드려졌는가를 살펴보고.. 성경에서는 어떠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는지를 보게 되면,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모습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시대적인 구분을 해본다면.. 크게 3대 시대, 그러니까 구약 시대, 신약 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시대들은 또 다시 몇 가지로 세분화 될 수 있지요.
먼저 구약 시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은 크게 3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족장 시대의 예배, 율법 시대의 예배, 포로 시대의 예배로 구분 되어집니다. 족장 시대의 예배는, 어느 한 부족 또는 가정의 대표가 신께 드리는 예배를 인도하는 집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창세기 8장 20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홍수 사건 직후..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하여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담아.. 가족대표해서 드린 것이지요. 이외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욥과 같은 족장 시대의 인물들이, 사람 등이 있었습니다. 이 제사는.. 오늘날로 치면, 가정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각 가정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제사장이 되어서.. 예배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대두되면서,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로 집중 조명 받고 있는 예배의 형태인 것이지요.
율법 시대의 예배는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에서 드려진 예배를 말합니다. 이때는 방법 면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과 예배의 형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이외의 방법은 그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9장 8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에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가져오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고 / 그 속죄제물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고 / 그 고기와 가죽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니라”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책인데.. 1장부터 7장까지는 여러 제사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어떠한 제물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장소적으로 성막과 성전의 차이가 있다면, 어디든지 이동이 가능했던 모세의 성막을 통해..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어느 곳이나 임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고, 왕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으로 고백되어졌습니다. 다윗이 대표적인 왕이었지요.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해서..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어차피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기도 했고.. 성전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함께 열왕기하 25장 8절과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이후 생겨나게 된 것이 ‘회당’이었고.. 그것은 신약에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예배의 특징은, 정착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교육의 장소로써 사용된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신약 시대의 예배입니다. 신약 시대는 크게 회당 예배와 초대 교회 예배가 있습니다. 포로기 이후,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여러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서, 조금 전 얘기했던 데로.. 회당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 시대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대로 드리는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세계 각지에 성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희생 제사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대해 해설하는, 그러니까 설교 중심의 예배로 변화된 것입니다. 함께 사도행전 18장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승천하시고 나서 초기 기독교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때를 초대교회라고 하는데, 이때에 가장 중요한 예배의 요소는 성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며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며 감사하는 예식으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지요. 그래서 크게 3부로 드려졌습니다. 말씀, 기도, 찬양, 헌금등이 있는 1부 예배.. 성찬예식을 하는 2부 예배.. 그리고 성도들이 서로 교제 하는 3부 예배로 드려진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 후에 함께 식사하는 것까지가 예배였던 것입니다. 함께 사도행전 20장 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라는 지역에 들렀습니다. 여기에서 ‘그 주간의 첫날’이라는 것은.. ‘주일’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기념하며, 성찬식을 갖기 위해 모인 것이지요. 그 다음 날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말씀에 갈급해 하던 성도들은, 밤새도록 집회를 한 것입니다. 우리 식대로 얘기하면, 말씀사경회 같은 것을 한 것이지요. 이때 ‘유두고’라는 사람이 2층에서 졸다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바울은 ‘아직 생명이 붙어 있으니, 우린 계속 말씀을 나누자.’라고 하면서 사경회를 이어갑니다. 이후에 바울이 말한 대로 다시 살아나긴 하는데..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나, 전하는 바울이나.. 이 정도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열심을 내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찌됐든, 사경회의 마무리가 어떻게 되느냐? 함께 사도행전 20장 11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7절에서도 그렇고.. 방금 읽으신 11절 말씀도 그렇고.. 떡을 떼는 것이, 단순히 성찬식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식탁 교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 이후, 오늘날의 예배가 되기까지는 많은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우선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입니다. 하나였던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고, 기득권층이 되고, 신도들의 숫자가 많아지게 되면서.. 정치적, 신학적인 이유로 1054년에 서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도 분열의 조짐은 계속 있어왔지만, 이때에 완전히 나뉘어진 것이지요. 동방교회는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헬라어를 예배 언어로 고수했고, 서방 교회는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라틴어를 새로운 예배 언어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중점 요소도.. 동방 교회는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에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수많은 상징이나 아름다운 장식 등을 통해서 보는 예배에 집중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창문을 형형색색 예쁘고 아름답게 꾸민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지요. 반면 서방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에 집중했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주석을 달고.. 성경공부를 한 것이지요.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스콜라 신학’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신학 사상들 가운데.. 비논리적이거나 이단적인 요소를 배제시키고, 교리와 이상을 조화시키는 한편.. 교회의 교리들을 질서정연한 체계로 배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가 여러분들도 한번쯤 들어보셨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집필한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분입니다.
분열 후에 동방 교회는 언어와 정치적인 자율성을 주어서 여러 나라에 ‘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콥트 정교회’ 등이 있지요. 서방 교회는 다른 말로 로마 가톨릭입니다.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여진,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다양한 분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이와 관계없이.. 로마 가톨릭은 계속 가기는 했지만, 칼빈이나 쯔빙글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개혁 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개혁 교회들은 각자의 신앙과 신학적 이해해 따라,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늘날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교회들로 분파되거나 새로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배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예배의 형식과 방법은,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의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 시대의 제사법을 기준으로 오늘날의 예배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예배는 우상숭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구약의 율법대로 오늘날에 희생 제사를 드린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헛수고하신 것과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예배의 형식과 방법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대답할 수 있게 되면, 우린 좀 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에 대한 방향을 설정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길목에 있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돌아서 가는데.. 그 날 따라 그 지역을 들르시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수가’라는 동네에서 잠시 머무르며 쉬고 계셨는데.. 마침 물을 뜨기 위해 나온 어떤 한 여인과 만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주도록 요청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상종하지 않는 상황이라,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과거 북 이스라엘에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수르 제국에 의해 망한 뒤에.. 앗수르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민족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의식이 강하고..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국가이다 보니까, 혼혈가족이 되어버린 사마리아를 기피하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이 여인은 그 동네 안에서도 천박하게 취급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해결되지 않는 영적/정서적 목마름으로 수차례 결혼하고, 현재는 한 남성과 동거중인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한다면, 부정한 여인이었던 셈이지요.
대화의 시작은 우물물이었지만, 그 주제는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생수’에 대한 얘기로 바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와 손가락질을 피해서.. 모두가 집에서 쉬고 있을 한낮에, 우물을 뜨러 왔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몸으로 그와 같은 고생을 계속 하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귀가 솔깃해진 것이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처음에는 동네 물정 모르는 아저씨로 생각했다가, 그 다음에는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여러 남편들을 두었던 본인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셔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묻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 시대에..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지역마다 성소가 있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예배 처소는 예루살렘이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솔로몬 이후에.. 남북으로 나라가 나누이게 되면서였습니다. 나라가 단절되다 보니,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유일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예배 처소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성전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것만 인정받았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에는, 온전한 예배로 인식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 시대의 배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의 형식, 장소, 방법 등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수가성 여인의 질문에 답변하고 계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태도,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장소에 대한 부분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곳은 교회처럼 어느 특정된 곳이 아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는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직장을 비롯한 모든 곳에 임재가 가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삶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배에 대한 태도는 ‘영’으로 드려야 한다는 말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영혼과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예배드려야 하는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참된 방법으로 예배 드려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화이트 박사는 기독교 예배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 앎에 응답함으로써 가장 심오한 경지에 접근하려는 신중한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대소요리 문답이나.. 성경을 참고해 보면,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을 드리면서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창조되었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예수님을 통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적인 예배 의식과 모든 삶의 봉사’라 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다같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육 전부를 의미합니다. 마음과 생각까지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흐름에 따라.. 육체와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일이나 수요일에 교회 와서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지 않는 동안..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온전한 예배를 드린 것이지요. 그러한 교육과 정신이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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