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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17-26 '여러 가지 믿음의 모습들'

설교방/일반 설교

by JJ family 2024. 11. 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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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9일 금요기도회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과 더불어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고 잘 아는 부분입니다. 최근에 저는 믿음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는데,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함께 숙고해 보고자 합니다.

어떤 한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어느 시장 바닥에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하기 위해 날마다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 목사님의 뇌리 속에 스쳐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앞에서 매일 구걸하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베드로 형님이 하신 것처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했는데,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을 경우에 망신당할 것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한참을 고민한 결과 그 사람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리고 와서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이 일어나기는커녕 앉은 채로 목사님께 화를 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무안해져서 돌아가신 뒤 원인을 분석하시고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 다시 그 사람에게 가서 이번엔 장소를 옮기지 않고, 시장 바닥에서 그냥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이적이 처음엔 일어나지 않고, 두 번째 했을 때에 일어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를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였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처음에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그 목사님이 사람의 눈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했기에 그 걷지 못했던 사람을 걷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당시의 핍박과 유대교의 압력,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오지 않음으로 해서 믿음을 져버리고 떠나려는 사람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지, 무슨 일을 하셨고 또한 하시는지, 믿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1장은 믿음에 대한 정의와 함께 구약의 인물들과 그 사람들이 어떠한 믿음의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서 살아갔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 인물들과 그룹들이 나오지만,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부모, 모세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 11장에서 가장 주목하고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3번을 언급하면서 서로 다른 믿음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는 자기가 가야할 곳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아가는 믿음의 담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자식이 한 명도 없고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굳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17절에서는 내려놓음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심술쟁이처럼 그 아이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히 어려운 시험이었는지를 알려면 창세기 1110절 이하의 말씀부터 보는 것이 좋습니다. 노아의 홍수 뒤에 아브라함이 속한 셈의 후예들은 30~35세 사이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30세 전후에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70세에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와 함께 하란 땅을 떠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100세가 되어서 이삭을 낳게 된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몇 살에 결혼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조상들이 한 것에 대입해 보면 30세에 결혼했다고 가정했을 때 70년간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란 땅에서 떠난 것을 기준으로 70세쯤 결혼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30년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시의 부족 국가 시대에는 자녀가 곧 재산이었습니다. 부족이 유지되고 존속되기 위해서는 자녀가 많이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저출산 세계 1위라고 하지만, 대부분 자녀 1명은 꼭 낳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임신이 잘 안되거나 할 수 없는 상태의 몸이면, 엄청난 마음고생, 몸고생, 돈고생이 따릅니다. 5년 정도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가정의 분위기는 상당히 침울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게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집안의 분위기는 하루 아침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더하면 더했지 이것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금지옥엽과 같은 자녀 이삭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마치 욥기 121절에서 이 자녀와 모든 소유를 잃게 되었을 때,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은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 이삭에 대해 자신의 자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를 인정하는 믿음.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삭은 그의 모든 생애를 살펴보았을 때, 권리포기의 믿음, 순응적인 믿음, 평화주의적인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창세기 2612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주변 부족들이 이삭의 번성함을 시기하고 쫓아내고, 이삭이 판 우물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쯤은 화를 내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싸울 만도 한데, 소소한 말다툼 정도만 하고 그냥 내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에 대해서도 이삭은 순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눈 어두움을 이용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장자의 축복을 획득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삭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아버지를 속인 것에 해당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호통을 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능력하고 대책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내어쫓김과 우물 분쟁으로 여러 지역을 이동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 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겨 죽이고자 했을 때, 이삭은 진심을 담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맡기는 이삭의 믿음인 것입니다.

야곱은 여러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 이기적이고 극단적 개인주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형 에서가 피곤하여진 것을 이용하여 떡과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얻습니다. 어미니 리브가가 시켰다고는 하지만 아버지 이삭의 눈을 속여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대신 받습니다.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지만, 정작 그 약속을 이행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라반 밑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그에게서 일한 대가를 받을 때도 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조작을 했습니다. 다 같은 자식인데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인 라헬의 자녀만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혀 분별하지 못할 것 같았던 야곱이 죽기 전에 자녀들을 향해 놀라운 예언과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해서도 차남 에브라임이 장남 므낫세 보다 더 크게 될 것임을 알고 그렇게 축복을 합니다. 야곱의 청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 여정을 들여다보면 인생에 달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솔로몬의 전도서에서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혈기왕성했을 때는 인간적인 방법과 노력으로 어떻게든 축복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말년에 가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쩌면 물질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냐, 현실이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에 대한 질문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모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선지자적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여자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의 환난을 겪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형제들과 다시 만나게 되고, 야곱이 죽은 뒤 두려워 떨며 동생 요셉에게 엎드려 비는 형들에게 창세기 5020, 21절에서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자신이 형들로 인해 겪고 고생한 일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형들을 안심시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위로하였습니다. 그의 선지자적 믿음은 유언에서 빛을 발합니다. 야곱은 애굽에 내려오기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죽기 전에 요셉에게 유언으로 전하였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약속에 대해 확인받았다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애굽에서 높은 위치에 있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누구입니까? 그는 꿈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유언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하나님께로부터 비전을 받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 자신의 유골도 챙겨가라고 유언을 남겼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아니었지만,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는 선지자적 믿음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모세의 부모가 어떠한 믿음의 모습을 가졌는가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당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에 두려워하여 산파로 하여금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2절에서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에게 잘 생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결혼해서 아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아무리 제 아이라 해도 소위 말해 갓 태어난 핏덩이가 아름답게 보일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저의 자식이니 당연히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모세의 부모가 아이를 낳고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라고 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잘 생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바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최대한으로 기를 수 있을 만큼 길렀습니다. 그 후엔 들켜서 갓난아기 모세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이 처벌 받지 않도록 강가에 버렸습니다. 버릴 때도 그냥 막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강 한 가운데가 아닌 물살이 가장 약하고 깊이가 제일 낮은 강 가 갈대 사이에 놓았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믿음이겠습니까? 저는 절대적인 사랑의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크고 위대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어겨 발각이 되면 아기도 죽고 가족 모두가 몰살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아기를 버리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자녀인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세의 부모도 그렇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이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모세를 있게 한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어떠한 모습일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버렸습니다. 왕족으로써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이지요.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진정한 가치를 아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갑니다. 상황에 좌지우지 당합니다. 쉬운 길을 선택하고, 편한 것을 따라 갑니다. 무엇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분별해보려는 노력이나 생각도 없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숨깁니다. 비그리스도인과 함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유흥을 즐깁니다. 제가 지금 그러한 분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못하고 살아가며 행동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여러 다양한 그리스도인들과 적잖은 상담을 주고받았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온 만큼 다양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어디까지가 믿음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인지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실례로 지난 719일 월요일에 방영된 프로그램과 관련한 신문기사를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9일 방송된 SBS ‘긴급출동 SOS 24’에서는 유방암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기도원만을 고집하다가 세상을 뜨게 된 한 여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다뤘다. 제작진이 직접 만난 제보 속의 주인공은 가슴에서 끊임없이 피고름을 흘리고 있었다. 3년 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장서희(51, 가명)씨의 가슴은 처참할 정도로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장서희 씨는 이 모든 게 병이 낫는 과정이라 믿으며 병원에 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장서희 씨는 소금을 넣은 밀가루 반죽을 상처 부위에 붙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며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그 방법만을 고수했다 장서희 씨의 병원치료를 말리는 사람은 기도원 원장인 이민숙(70, 가명)씨였다. 심지어 이민숙 씨는 자신의 치료 덕분에 장서희 씨의 병이 다 나았다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고 있던 것. 제작진이 이민숙 씨의 치료법을 확인한 결과 손가락을 환부에 대고 기도하며 소금 넣은 밀가루 반죽을 처방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감사함의 마음을 현금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죄의 대가로 환자가 죽게 된다는 말을 하는 이민숙 씨. 그의 말을 굳게 믿고 있는 장서희 씨 역시 감사 헌금을 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암의 정확한 진행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진단이 시급했지만 장서희 씨의 잘못된 믿음을 부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장서희 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병원에 입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장서희 씨는 제작진의 오랜 설득 끝에 아들을 기관에 보내고 병원치료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장서희 씨는 암 세포가 몸 전체로 퍼진 상태여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기도원에 대한 얼토당토않던 믿음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치료의 기회를 놓쳤던 것. 이에 가족들은 기도원 원장을 고소했고 경찰 측에서는 피고소인에 대한 범죄 행위가 인정될 경우, 법대로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방송과 기사를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 여인은 아마도 크리스찬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기도원은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이비임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 여인이 알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알았어도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혹시하는 마음에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건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치료와 기도를 병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직접 매달리며 간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한 사람으로만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그 여인과 같이 잘못된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함께 히브리서 121, 2절을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장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여러 믿음의 선배들을 통하여 다양한 믿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사람으로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원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갔습니다. 영국의 어떤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가게된 것입니다. 거기서 몇 해를 전도하던 가운데 하루는 영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선교회 총무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선교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당신의 월급을 매달 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써도 안 됩니다. 섭섭한 일이지만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하는 일종의 소환장이었습니다.

테일러는 민망해졌습니다. 멀고 먼 곳에 전도하러 왔는데 선교 비용이 없어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가자니 민망하고, 계속하자니 앞일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 테일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데 구약성서 중의 히브리어 두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에서 나오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 하는 뜻을 가진 '에벤에셀'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여호와 이레' 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느니라" 하는 뜻의 단어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사 드리려 올라갈 때에 양은 어디있습니까?”라는 이삭의 질문에 대답하였던 말이었습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이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하는 말씀을 믿고, 중국 땅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중국 사람 입는 대로 옷을 입고, 중국 사람 먹는 데로 먹고, 중국 사람 자는데서 자고, 중국 시람과 똑같이 살면서 전도를 계속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전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많은 동역자들을 보내 중국내지선교회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냐, 현실이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심으로 믿음과 하나님을 선택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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