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7일 수요예배
서론
2개월 전쯤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예정보다 1년이 미루어졌던, 5년 만에 개최된 올림픽이었습니다. 이미 끝난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펜싱.. 여자 배구.. 사격.. 양궁 등의 경기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들이 보여주었던 투지나 열정은, 계속 회자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림픽에는 상당히 많은 스포츠 종목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이 남는 경기들은, 짧은 시간 안에 결판이 나는 것들입니다. 그 경기들은 대부분 육상 종목에 몰려 있지요. 단거리 달리기나.. 멀리 뛰기, 높이 뛰기, 포환 던지기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기들에 집중해서 보게 되는 이유가.. 예를 들어서 4년 동안 정말 열심히 훈련했는데, 경기 중에 갑자기 다리에 경련이 와서 중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경기 시간이 몇 십 분 되는 것도 아니고, 몇 초의 승부를 위해서 오랜 시간을 훈련해 온 것이 허무하게 끝나기 때문인 것이지요.
어찌됐든, 여러 육상 종목에.. 가장 손에 땀을 쥐는 경기는, 달리기 계주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학교나 단체에서 운동회 할 때.. 반드시 하게 되는 종목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400미터 계주 경기를 할 때에, 정식 스포츠 대회에서는.. 4명의 선수가 순번을 정해서 100미터 씩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직선과 곡선 구간이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순번을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구간과 거리를 넘어가면, 곧바로 실격입니다. 혼자서 2,3백 미터를 질주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또한 1등으로 들어왔어도..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건네 주거나 넘겨 받지 못하게 되는 것도 실격패가 됩니다. 따라서, 우승하겠다는 집념하에 독불장군식으로 하지 않고.. 동료 선수를 신뢰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협동 경기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이러한 협동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다 하려 하지 않고, 옆에 있는 믿음의 동역자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주신 사명을 아름답게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는 1장에서 9장까지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중심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섬김과 신적인 권능을 증거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요. 후반부인 10장부터 16장까지는, 수난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인류 구속 사역의 성취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이 바로 마가복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해서 전체 분량의 40%를 다룰 만큼.. 다른 복음서에 비해 십자가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수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당하는 여러 형태의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4개의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본문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공관복음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관점이 같다는 것이지요. 짧게든 길게든.. 동일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관점이 달라서 겹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조금 밖에 없지요. 3개의 공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예수에 초점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성부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공통본문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땅에서 살아가셨을 동안 예수님의 삶 가운데.. 절대 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특별한 서문없이, 본론으로 직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의 1차적 독자가 로마인이기에.. 그들의 성향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본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기도 해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처럼, 족보를 별도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요. 본문 1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 상황으로서는 굉장히 위험하고도 도전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나라들은.. 황제만이 유일한 신의 아들로 인정되고, 추앙받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황제숭배 신앙이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제우스나 아데미 같은 신들도 믿기는 했지만, 주로 황제를 숭배하게끔 했었습니다. 특별히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들은 아무 도시나 무작위적으로 건설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식으로 얘기한다면, 공개 입찰 같은 방식을 통해서.. 신전 유치를 했고, 택함받은 도시는.. 중앙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나 버가모.. 고린도 등의 지역에 가보게 되면, 그러한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황제 숭배와 같은 통치자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사상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의 황제들.. 중국의 ‘천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의 ‘천황’이나 태국의 ‘국왕’ 등, 모두가 신적인 권위를 부여해오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당시 헬라 문화에서.. 신은 거룩한 영역에 속해 있는 존재로 여겨졌기에.. 더러운 물질 세계를 입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차후에 예수님의 인성에도 영향을 끼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천사나 귀신처럼.. 영적인 존재로 오셨다고 하는 내용의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단들이 등장하기도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그분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인성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셨음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고 계신 동시에.. 저와 여러분들처럼, 분노.. 피곤.. 굶주림.. 슬픔 등의 감정을 지니신.. 인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본문 1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 메시지는.. 바로 그 예수님께서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된 것, 그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한데..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마가복음의 첫 시작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시면, ‘아르케 투 유앙겔리우’라고 해서.. ‘복음의 시작이다’라는 말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소유격으로 해서.. 뒤이어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유앙겔리온’은 문자적으로 ‘복된 소식’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즉위식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알릴 때 사용되어졌던 단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 예수님의 사역과 그의 주되심을 믿고 그의 뒤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식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어서 본문 2절과 3절을 보시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2절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한 것이고, 3절 말씀이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찍이 약속하셨던 사람을 보내셨다는 것이지요. 이것 역시, 우리에게 두 가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관점에서는.. 말라기에서 약속하신대로,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예수님 앞에 보내시겠다고 굳이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메시야’이지.. 그 앞에 누가 오는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약속을 하셨다 하더라도.. 보내지 않아도 문제가 될 것도 없었습니다. ‘아, 맞다.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보내기로 했었지! 미안하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보낼만한 사람이 없다. 대신 너희를 구원할 메시아를 예정보다 빨리 보낼게.’라고 했어도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약속을 하시고.. 실제로 지키셨으니, 그보다 더 중요한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 예언된 모든 약속의 말씀들.. 그중에서도 메시야와 관련된 예언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고, 성취될 것임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지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시겠다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것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르침은..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시면,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 71편 6절에서는, ‘내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습니다.’라 고백하고 있지요.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 특별히 선지자들에게만 중요한 사명과 부르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으로 넘어와서..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값으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같은 목회자 혹은 선교사들에게만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각자의 영역과 위치와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복음이 전파되는 삶.. 전도와 선교를 통해 생명을 구하기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과 부르심을 명확하게 깨닫고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의 삶을 되짚어 보았을 때.. 그는 세 가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제 곧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시게 될 것인데.. 여러분들이라면, 어떠한 일을 해놓으시겠습니까? 곳곳에 포스터와 현수막을 붙이고.. 예수님께서 편안하게 순회 전도하실 수 있도록,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곳을 예약해 놓으면 되겠습니까? 그러한 은사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그에 맞게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엘리야와 같은 사역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소견과 우상을 향해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지요.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어졌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디. 그 일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요단강가에서.. 회개하는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지요.
말이 좋아 세례를 주는 것이지.. 한 두 명도 아닌,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간혹 군대에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진중 세례식을 하게 되면, 몇몇 분의 목사님들이 초대 받아서 함께 진행합니다. 그곳에 다녀오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하루 종일 쉴새 없이 수 십 수 백 명에게 안수하며 세례를 주고 나면, 나중엔 기진맥진해서 쓰러진다고 합니다. 하물며 세례 요한은, 한 명씩 사람들이 나아와 죄에 대해 고백하는 것을 모두 듣고.. 진심을 담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체력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좋은 음식을 충분히 섭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이 전부였던 것이지요. 고단백 식품일 수는 있겠지만, 매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에 있어서는.. 체력적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쉽고도 편안한 사역들이 없어서..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였던 것이지요.
세례 요한이 보인 두 번째 모범은, ‘겸손’입니다. 그는 당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인식될 만큼,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그 앞에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기득권 계층인 종교 지도자들이나.. 관료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지만,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적 지지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당시 유대인들을 다스렸던 헤롯왕조차도.. 그를 함부로 잡아들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그가 전하는 호통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의 찔림과 함께 평안을 갖기도 했었지요. 덕분에 그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만 갔는데.. 나중에 예수님께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라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보내겠다.’라는.. 세례 요한과 관련한 예언의 말씀을 하신 것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닌..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할 수도 있음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쯤 되면, 자아도취해서 실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테면, 신흥 종교의 교주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이 정말 대단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추켜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스스로를 낮추었다는 것입니다. 인정과 칭찬과 높임과 편의를 위해..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굳이 해명하지 않고 그냥 묵인했어도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가 신발끈조차 풀질 못할 만큼 더 대단한 분이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메시야가 아님을 정확하게 밝힌 것이지요. 이렇게 본인의 사명과 자신의 위치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야에 대해 예언된 말씀들을 통달했다는 뜻입니다. 이전까지 직접 만난 적은 없었겠지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을 계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알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과 예수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끝으로 세례 요한이 보인 모범은, 자신이 달려야 할 구간이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는 것까지 였던 것이지요. 본문 8절에 보시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신발끈도 감당하지 못한다.’라는 고백이나, 지금의 이 말씀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소위 말해, 허세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사람들이 나를 무어라 부르느냐?’라고 했을 때에.. ‘세례 요한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 정도로.. 세례 요한은 ‘국민선지자’였습니다. 그 정도의 인기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면, 얼마나 크고 다양한 사역들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의도순복음교회나 명성교회처럼 대형교회를 세워서 목회를 하신다던지.. 과거 빌리 그래함 목사님처럼 복음전도자가 되던지.. 혹은 선교단체를 만든다던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것과 같은 대형교회나.. 순회 전도자, 선교 단체 등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들과 교회 혹은 단체 등은.. 그 시대에 필요한 사역들을 감당하고 있지요. 그것과는 별개로.. 세례 요한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꽤 많았었던 만큼.. 얼마든지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대거 이동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은, 제자를 양성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지요. 광야의 외치는 소리 처럼.. 메시야가 오심을 알리고, 그분이 하고자 하시는 사역에 길을 닦아주는 역할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덕분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감옥에 갇혀서 더 이상 사역할 수 없었을 때에.. 자연스럽게 연속성 있는 사역을 하시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상황.. 그리고 타국인으로서 수 개월 동안 강제 격리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난 지금.. 많은 분들이, 원인 모를 분노와 깊은 좌절감과 우울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얼마전 국립중앙의료원이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 동안 자해하거나 자살을 시도해서 응급실을 찾은 사람이 하루 평균 1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루 평균 35명 정도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지요. 이곳 호치민의 한인들의 경우에는.. 지난 7,8월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한국으로 돌아간 사실을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현실을 놓고 보면, 삶에 대한 기쁨과 소망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지나가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둡고 긴 터널에도 반드시 끝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서양의 몇몇 나라들은 ‘위드 코로나’를 진행하고 있고.. 우리나라와 이곳 베트남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다 보면.. 코로나 발생 이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일상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날을 위해,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공예배를 통해서.. 개인의 경건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알게 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제 각 기관과 부서에서도 그렇고..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도, 2022년 계획을 세우고자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것도 있으시겠지만, 그것과 함께..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시는지.. 그분의 뜻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부르심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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