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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6:1-10 '평상심의 신앙'

설교방/일반 설교

by JJ family 2024. 1. 23. 15:36

본문

2021년 7월 28일 수요예배

서론

지난 23일 금요일, 코로나 상황 속.. 깊은 우려 속에서 도쿄 올림픽이 개막했습니다. 이미 한 차례 연기했던 터라.. 취소하거나 또 한 번 연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강행하게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찌됐든, 올림픽에 참가하는 스포츠 선수들이..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량을 갈고 닦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신적인 부분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시합으로.. 4년 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선수들끼리의 실력은 대부분 비슷해서.. 현장에서의 어떠한 변수에도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메달을 거머쥐는 것이지요. 특히나 그 어떤 종목보다도 사격.. 양궁.. 골프.. 같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경기 종목일수록, 소위 말하는 멘탈 관리를 잘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때 필요한 것이 평상심인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상황과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기 위해..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코로나를 비롯한 세상의 여러 환경과 상황 속에서.. 믿음 잃지 않고, 굳건한 신앙을 유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구약 성경에는 세 명의 서로 다른 다리오 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활동한 다리오 왕이, 우리가 오늘 읽은 다니엘서의 다리오입니다. 이 왕은 기원전 539년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으로 기원전 521년 경에 학사 에스라와 선지자 학개, 스가랴가 활동했을 당시의 왕의 이름도 다리오입니다. 끝으로 기원전 423년경, 느헤미야가 있었던 때의 왕도 다리오입니다. 다른 두 명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과 그다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제쳐두기로 하고, 다니엘에서 나오는 다리오 왕에 대해 잠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다리오 왕은 531절을 보시면, 육십 이 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늙은 나이에 왕이 된 것이지요. 이미 죽었어도 됐을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 정도 거대 제국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91절에서 아하수에로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다리오의 아들이 아하수에로인 것이지요.

또한 101절에서 바사 왕 고레스 제 삼 년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고레스는 다리오 왕을 가리킵니다. 628절을 보시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을 해석하기에 따라 다리오 왕의 시대, 즉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순서가 바뀌고, 명칭이 서로 다른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이 많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2장과 7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바벨론 통치 이후에 메대와 헬라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사야 13장과 21, 예레미야 21장에서 바벨론이 메대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어서, 더욱 혼동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는 기원전 553년에 바사 왕 고레스가 메대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나서, 그들과 함께 바벨론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다리오가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면서 기원전 520년 경에 바벨론을 다시 한 번 정복하게 됩니다. 약간 어지러우시죠?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역사적인 배경을 조사할 때에, 정리하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정리되어진 것을 보고 듣기만 해도 혼란스러운데, 당시 그 한 가운데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어지럽겠습니까? 다니엘이 살아가고 활동하던 시대가 그러했다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성경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역사가는 아닙니다. 물론 역사적 기록과 어긋나지 않게 되어 있는 부분도 있지만, 다니엘서처럼 정확한 추측이 어렵거나 약간 잘못 되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성경이 인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실제 역사와 달라도 그다지 상관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제 멋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환경과 상황에 좌지우지 당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갔는가?’입니다. 오늘 읽은 다니엘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리오 왕이 역사 속에서는 누구였는지, 방백을 몇 명 세웠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교만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겼을 때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리오 왕은 방백 120명을 세우고, 자신의 제국이 손해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 명의 총리를 세웁니다. 그 중의 한 명은 멸망 당한 유대 왕국의 포로였습니다. 하지만 다리오 왕은 전혀 개의치 않고 총리로 세우는 데다가, 가장 총애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마음이 민첩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 나니까 전국을 통치하는 직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 다리오 왕은 매우 훌륭한 왕으로 비춰집니다. 겸손히 정의롭고 공평하게 치리하는 다니엘은 왕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신하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어떻겠습니까?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다리오 왕의 성품을 칭송했겠습니까?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가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도 횡포를 부리지 않고, 잘 다스리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쳤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사람의 죄 된 본성은 남이 잘되는 모습을 볼 때.. 배 아프게 하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서로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시기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나라를 건국한 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운 공에 따라 상급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공에 비해 받은 것이 적다고 생각되어지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민주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매번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인사 등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싶을 것이겠지요. 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당선되는 데에 있어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에게 좋은 자리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후에 관계가 틀어져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청문회를 통해서나.. 국민들이 그 사람의 비리를 밝혀 문제 삼지 않는 이상, 울며 겨자 먹더라도.. 요직에 앉혀야 하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분명 충성된 신하로써 왕의 마음에 합하도록...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나라를 잘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 때 어떠한 공도 세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있을 때 멸망당한 유다의 포로로 있었고, 그 바벨론은 메대와 바사에 멸망되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또다시 포로 상태로 왔을 것입니다. 간혹 삼국지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적군의 뛰어난 장군과 책략가를 여러 방법을 통해 데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전투 중에 고립되게 만들어 생포를 합니다. 그 다음 갖가지 방법으로 회유와 설득을 하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마음을 돌이키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중요한 위치에 앉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실력은 인정하더라도 기존의 멤버들은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 쉽게 그 사람이 섬기던 조국과 주군이 해를 입게 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혁혁한 공을 곧바로 세웁니다. 그 뒤에는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은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다니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상태였고... 포로로 잡혀 와서 해몽을 잘한 덕분에 높임을 받긴 했지만, 그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다시 한 번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메대와 바사를 위해 특별한 공을 세운 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다니엘의 성품이 뇌물을 받아 불법이나 편법을 한다든지, 왕족과 귀족 같은 기득권층에게 아부 같은 것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명정대하게 하다보니 부정부패를 일삼는 기득권 세력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거 대상 일 순위였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수를 두게 됩니다. 바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문제 삼아 다니엘을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5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5절 말씀에 앞서 4절 말씀을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니엘을 고발하려 했지만, 아무 근거도.. 아무 허물도 찾지 못했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가 충성되어 그릇됨이 없다는 것에 대해.. 그를 없애려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지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속담이 통용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의 적들에게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감정적으로는 배 아프고 기분 나쁘지만, 이성적으로 봤을 때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빈틈이나 허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주위에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다니엘처럼, 공명정대함과 실력만큼은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다니엘에게서 아무런 허물을 찾지 못했을 때에, 그것을 놀랍게 여기면서.. 다니엘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행복했겠지요.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기심과 질투심에 눈먼 그들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기 위해 이상한 법령을 세우도록 건의합니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던 일단 다니엘을 사자 굴에 들어가게 하면, 자기네들 뜻대로 잡아 먹혀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문제 삼지 않고, 다니엘에게 털끝 만한 실수라도 있어서 그걸로 문제 삼았다면.. 아마 다니엘은 그들의 바람대로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하나님이 다니엘을 보호하셔서 사자들이 먹지 못하게 하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나마 중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 그들은 죽음이라는 댓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어찌됐든 총리들과 고관들이 삼십일 동안, 왕이 아닌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넣자고 건의를 합니다. 여기서 짚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법령에 대해 다니엘이 언제 알았는가?” 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라고 되어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조서가 왕 앞에 가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다니엘은 총리 중에서도 으뜸이었기 때문에 왕에게 보고되기 전에 다니엘을 먼저 거쳐 갔어야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조서가 절차상 다니엘에게 싸인을 받고, 왕에게 갔을 것인데.. 다니엘이 전혀 개의치 않고 통과시켰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는 다른 총리들도 있었으니, 그 사람들도 왕과 직접 대면하여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면, 다니엘의 손은 거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7절에서 모든 총리라고 언급은 되어 있지만, 다니엘 없이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문맥을 살펴보면 한 두 명이 추진한 것은 아니기에, 이들이 꾸미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든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수행비서가 보고했을 수도 있고, 그를 흠모하거나 동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와서 알려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 조서가 왕 앞에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총리 위에 총리라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휘하 병사들을 출동시켜서라도 얼마든지 못하게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조서에 도장이 찍히도록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좀 더 상상해 본다면, 그 조서를 가지고 다니엘과 흥정하려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편의를 봐주시면 많은 보물을 드리겠습니다. 안 그러면 이 조서를 왕에게 드려서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당신을 사자 굴에 쳐놓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 협박에 가까운 흥정을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했다고 가정했을 때에 조서가 통과되었다고 한다면,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소신과 신앙을 굽히지 않는.. 그런 다니엘의 모습을 더욱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의해 이 조서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상황에 좌지우지 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이 했던 기도는 조용히 묵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중얼거리듯 소리를 작게 내어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기도는 큰 소리로 외치는 기도였습니다. 열왕기상 846절에서 50절에 나오는.. 솔로몬 왕이 성전을 모두 짓고 나서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던 내용.. 주께 범죄함으로 적국에 사로잡혔더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죄를 사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에 하나님은 불로 화답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다 민족은 이 기도의 내용을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드리는 습관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기본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였기에 자기 집에서 했더라도, 외치며 기도해서 누구든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전에 하던 대로 습관을 좇아 기도했습니다. 하루 세 번씩, 밥을 먹는 것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저 자신을 보더라도 습관을 좇아 죄짓는 것은 쉽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은.. 매일 한 번씩 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희 가정은 주로 자기 전에 기도를 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에는, 중간중간에 좀 더 많은 기도를 하기도 하지요. 또한, 너무도 배가 고프거나.. 정신없이 바쁠 때면, 식사 기도도 하지 않고 밥 먹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쩔 때는 간단히 하나님 땡큐!”라고 하면서 식사할 때도 있지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조금 나은데, 형편이 괜찮아지면 다시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대충 비교해도 다니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니엘은 그 믿음이 변하질 않았습니다. 포로로 처음 잡혀왔을 때에는 상황적으로 어려우니까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출세하고 신분이 높아져서 안정이 되면, 금세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다니엘은 바벨론에 있었을 때에도, 메대와 바사 제국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들을 검토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기도시간을 줄여도 괜찮겠지? 일처리를 잘못해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우면 안 되니까 하나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앞으로는 아침저녁 두 번만 해야겠다.’ 이런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줄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저 같으면 그랬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다니엘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다니엘 자신을 해하기 위해 조서를 꾸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통과시킬 것이라는 예상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였다면, 에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래.. 앞으로 30일 동안은 창문도 닫고,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자. 이번 기회에 잠시 휴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좀 쉬고 잠을 좀더 자야지.’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길을 가련다.’하고 꿋꿋히 평상시에 하던 대로 변함없이 하였습니다. 환경과 상황에 좌지우지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으로 일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모습 속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교차되어 보여집니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실 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부인하신다거나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상황은 종료되었을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사도 어쩌면 막을 내렸겠지요. 인류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끝까지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 역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면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으로 인해 인류는 구원을 받았고, 사단의 권세는 깨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는 사단들이 잠시 기뻐했겠지만,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신앙을 지켜서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에 그를 시기하던 신하들은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다니엘은 무사했고,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온 천하에 높아졌습니다. 625절에서 27절의 말씀에 나와 있듯이, 이방 나라에서 이방인 왕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떨며 두려워하도록..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도록 전국에 선포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영광이 나타나는 일들이 있게 되어질 줄 믿습니다.

저는 예전에 마귀에게 삼키움을 당한 것과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환경과 상황을 바라보면서 따라가다가 넘어지게 된 것이지요. 깊은 상처를 받고 피투성이 되어가는 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손전등 없이 어둠 컴컴한 동굴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완전히 힘을 잃고 넉다운 되어 쓰러졌을 때, 성경을 읽다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너의 믿음은 어디로 갔니?” 라고 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태해진 저의 신앙생활이 원인이었습니다. 기도와 말씀 보는 것을 게을리하고, 날마다 컴퓨터에.. TV.. 헛된 것에 시간을 소비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상황을 따라, 환경에 따라 반응하다가 그러한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요즘 강력한 코로나 방역 조치로 인해.. 가정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계실텐데, 나태해지지 않고.. 영적인 실력을 쌓게 되는 기회로 삼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구멍이 생겼을 때 괜찮겠지...’로 방관했다가는 나중에 큰 봉변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근신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마귀에게 삼켜집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서 살아나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근신하고 깨어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날마다 기도하는 시간과 말씀 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일대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할 때에 그 어떠한 것도 저와 여러분들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이사야 263절의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신분이 높아지고 삶이 안정되었을 때에는 감사하다가, 환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하소연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을지 몰라도, 오늘 본문 10절에서 보신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항상 감사의 제목들을 올려 드렸습니다. 자신을 해하려 하는 무리들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날의 감사한 것들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뢰와 믿음이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의 신앙을 갖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다니엘처럼, 코로나가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평상심의 신앙으로.. 날마다 평강에 평강을 더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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