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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0-21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라

설교방/일반 설교

by JJ family 2023. 1. 2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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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5일 수요예배

서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 식물은 모든 생물에게 먹을 양식을 제공하고.. 지구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만약 이 땅에 풀과 꽃과 나무가 없다면, 그 어떠한 것도 살 수 없는.. 사막뿐인 행성이 되는 것이지요. 곤충과 동물은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의 존재의의는 생태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겠습니까?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 땅에 던져진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아무 목적과 이유 없이.. 그냥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자들은, 인간들의 삶을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지요. 이와는 정반대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하며, 특별한 힘과 지혜를 가진 존재임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다양한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좀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것은.. 한 귀로 들어서 흘려보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은 귀 담아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바라기는, 오늘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사명과 사랑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사도 바울에게는 그의 인생에 방향과 목적이 되는 몇 개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 말씀에 도전을 받고, 이 말씀을 비전으로 삼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며 살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 역시,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영감과 감동을 주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길 원하노라.”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접할 때 어떤 감흥이 있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권면하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자세가 어떠한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권면의 말들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강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바울 스스로가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아가는 언행일치의 삶을 통해, 롤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구절의 짧은 말씀이지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이 전하여지는 것입니다. 함께 빌립보서 118절의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삶으로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잘하고 잘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기독교에 호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벌 떼 같이 달려들어 기독교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의 자세도 여러 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은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적극적으로 전도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그런 분들을 뵈면 꼭 저렇게 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교회 다닌다는 사실조차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전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쪽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조금 전에 읽었던 말씀에서처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든지, 부정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든지, 복음만 전파되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그것으로 인해 기뻐한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와 같은 마음을 품게 되길 소망합니다. 길거리에서, 전철 안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분들을 뵈면,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공공장소에서 노방전도 하는 분들을 미련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4,5년간 선교활동을 하고 온 다음에는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음 놓고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중국뿐이겠습니까? 지금 분쟁으로 시끄러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순간 테러를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베트남에서도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지요. 북한만 바라보아도 전도는커녕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낼 때부터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시야를 넓힐 때,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히 담대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언제나 담대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확신에 차있는 말들은..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온전히 담대해지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담대히 전하지 않으면 그 능력은 반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쁘게 복음을 전해야 그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온전히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도, 눈 먼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을 때도..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핍박을 무릅쓰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 하는 사람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부분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말과.. 행실과..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함께 이사야 4321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편 1506절 말씀도 읽어보겠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택이 아닌.. 명령형으로 되어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멈추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죽는 그 순간에도...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존귀하게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빌립보서 전체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다섯 가지 정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첫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완벽했던 에덴에서의 삶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인류에게 죄악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틀어지고 타락하게 된 것이지요. 세상은 사단에 의해 농락당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철저한 헌신과 순종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나마 이 땅 가운데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도 허물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복음을 위해 고난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벌레만도 못한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비천한 육체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능히 피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담담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헌신은... 철저히 우리 인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내용인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저와 여러분들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완전한 구원의 길을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에...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 희생하고 배려하는 삶, 그리고 복음을 위해 고난조차 기뻐하는 삶... 이것이 내 수준이 아닌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할 때에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고, 그 삶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3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 말씀을 읽으실 때에 발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낮다, 못나다가 아니라 낫다, 훌륭하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높아지길 원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면서 그러는 것은 좀 나은데,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을 밟고 섭니다. 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하하고, 무능력함을 드러내고, 단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지요. 악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피하실 수도 있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스스로에 대해 얼마든지 드러내고, 모든 인기와 영광을 독식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셨지요. 이렇게 여러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훌륭하게 여기실 때,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높이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없이 하는 것입니다. 함께 빌립보서 214절에서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 선교사 신분으로 있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있던 선교 베이스는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일이 많았습니다.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단과 대학 수준의 베이스였는데, 함께 동역하는 선교사들이.. 많을 때는 30명이 넘기도 했던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공안들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었지요. 어쨌든 한국 선교사들은.. 베이스 책임자의 지시 아래, 아침 7시에 나와서 큐티 모임을 가졌습니다. 9시부터 정상적인 업무를 보기 시작하는데, 수업은 저녁 6시쯤부터 시작해서 9시에 끝이 납니다. 그럼 최소한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는 그곳에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할 수가 없으니까, 그 대안으로 매월 문화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진행하기 위해 하루도 쉴 새 없이 아이디어 회의와 행사 준비를 했었지요.

거기에 전도여행팀이 끊이지 않고 왔었습니다. 아무래도 베이스 규모가 꽤 되는데다가.. 동역하는 선교사들의 국적이 다양하다 보니까, 세계 각지에서 오는 것이지요.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외부의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한국어와 영어캠프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일들을 저를 포함한 한국 선교사들이 조정했어야 했습니다. 물론 영어권 선교사들과 중국 직원들도 있었지만, 주도적인 역할들은 모두 한국 선교사들의 몫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일이 많다보니 선교사들이라 해도 시비나 원망이 생길 때가 간혹 있었습니다. 관계가 어려운 적도 있었고, 심하게 언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서로 나눈 얘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싸우면서... 시비가 생기면서... 뭐하러 하느냐? 우리가 이러려고 왔느냐?”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투는 모습을 보면 중국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느냐?” 그런 다음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일을 접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고, 다시 마음을 합해서 진행시켰던 것이지요. 때로 자신의 열정과 서로 간에 의견이 달라서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기억한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복음이 온전히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을 전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넷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삶입니다. 함께 빌립보서 313절과 14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구원받고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시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놀라 이곳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떠나지 말고 그곳에서 살자고 건의를 하게 되지요.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을 보시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그냥 그 산에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단 한 번도 너희만 나를 믿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아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 명령은 단지 제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된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할 것에 대해 권면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상황과 타이밍에 구애받지 말고, 기회만 되면..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사명이고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께 속한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세상에 속해서 세상을 따라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다 보면 결국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갈 때는 넓고 편할지 몰라도 그 끝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절과 14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나님께 속하여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더디 가는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이 들어서, 믿음과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다가.. 해외에 나와서는 지쳐서 쉬어야겠다는 이유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나안 성도들이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삶의 곤고함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하지만, 좁은 길의 끝에는.. 값진 면류관들과 상급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삶의 다섯 번째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빌립보서 48절의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땅의 것은 방금 읽은 말씀과는 대조적인 것들 입니다. 거짓되고, 불경스럽고, 잘못되고, 미움과 다툼이 있는 것이지요. 불안과 근심과 걱정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진실하기보다 사실을 왜곡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경건한 척하는 사람은 많아도, 진정 경건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의 경계선은 불분명하고, 힘 있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 정의로 여겨지는 세상이지요. 거룩하고 정결함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기 보다는 헐뜯고, 비난하고, 시기와 질투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칭찬, 격려, 위로, 축복보다는 저주받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지요.

정글에서나 있을 법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마치 일종의 사회법처럼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조금 전 함께 읽었던 사도 바울의 권면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어린 아이 같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가 하는 말처럼 들려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이 땅에서 가능할 것 같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믿음의 선배들도 예수님처럼 살면서 그들의 신앙과 믿음을 하나님 앞에 증명하였었지요. 바라기는, 예수님과 여러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믿음과 신앙이 인정받으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마지막 세 번째는 21절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부분입니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이 고백이 사도 바울을 있게 한 것 같습니다. 그는 35절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합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 소속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학식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나 다름없을 정도였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도 있어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박해하려고 까지 했었지요. 당시의 가치관과 기준에서 흠이 없고 최고의 스펙을 가진 삶을 살았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던 것이지요. 자신이 배우고 알아 왔던 모든 학문들을 하나같이 해로 여기고, 배설물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스스로를 철저히 낮춘 것이지요.

한 때는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는 모습을 보며, 당연하게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살기가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회심한 이후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 것이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돌에 맞고, 곤장을 맞고, 타고 가던 배가 난파를 당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어도,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죽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사명과 부르심을 감당하기 위해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죽음의 위협조차 사도 바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였기 때문인 것이지요. 자신의 삶을 통해서.. 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일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고백은 쉽게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별로 가진 것이 없거나, 핑크빛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아쉽거나 지켜야 할 것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많은 특권을 누려왔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많은 부귀와 권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라고 고백은.. 말하기도 힘들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전혀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이 성숙해 갈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때로는,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오도록..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도록, 어떠한 수고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는 일도 없었지요.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로마의 총독과 관리들 앞에서, 어쩌면 폭군 네로 황제 앞에서도...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는 복음을 증거 하는 것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케만 된다면, 다른 모든 어려움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열정과 헌신에 도전을 받으시고, 그 삶의 태도를 본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아시다시피,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로 투옥되었을 때, 기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요. 이 서신을 기록하고 나서 4,5년 뒤에 순교를 당하기는 하지만.. 이때에도 오래지 않아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오랜 전도여행과 어느덧 나이 들어 연약해진 상태로.. 수감 생활이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쁨행전이라 불릴 만큼 빌립보서 안에는 기뻐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지요. 물론 기쁨 없이 열심만 가득했던 빌립보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언이었지만.. 단순히 피상적인 충고였다면, 그의 권면은 아무 영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 속에서도.. 감옥에 범죄자 신분으로 갇혀있는 중에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갔기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현재, 더욱 강력해진 방역 조치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지요.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지고 강퍅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불신자처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세상에 맡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지 않게 되겠지요. 하지만, 어떠한 환난과 고통 중에도.. 지금과 같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매순간 기쁨과 감사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통해 복음이 증거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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