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일 새벽예배 (새 204장 / 주의 말씀 듣고서)
서론
저는 운동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는 것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주로 야구, 축구, 농구 등을 즐겨 보았지만, 비인기 종목의 스포츠들도 즐겨 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깊은 감동이 되고.. 도전이 되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환경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스포츠 뉴스를 보거나, 유튜브에서 가끔씩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스포츠 경기를 보다보면 가끔 맥이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나 우리나라 국가대표 경기 가운데,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 부쳐서 선취점을 올렸지만..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 무승부로 끝나거나, 패배하는 경우입니다. 그래도 국내 프로 리그는 져도 크게 상관이 없는데, 국가대표 경기는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보다 실력이 낮은데도 지게 되면 열 받고.. 세계 랭킹이 더 높은 선수나 국가와 맞붙었을 때, 잘 나가다가 끝에 가서 역전 당하게 되면.. 상당한 아쉬움이 남는 것이지요.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긴 하셔도.. 이미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싸움에, 좌절하거나 쓰러지게 되면.. 매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시원케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유다 지파에 이어서.. 요셉 가문도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함께 언급하기 위해서 ‘요셉 가문’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지요. 본래 이름이 ‘루스’였던 ‘벧엘’을 치러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벧엘’이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처음 등장한 것이었습니까? 야곱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형 에서의 얼굴을 피해서.. 외가쪽 식구들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가기 직전,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었습니다. 그가 잠자던 중에,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가 있어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과 자손을 번성시켜 주시겠다는 것을 언약으로 주신 것이지요.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이어받았던 곳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곳이어서 그랬는지.. 공교롭게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요셉의 가문에서 그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 가문은 어떻게 ‘벧엘’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까? 그곳 역시 헤브론처럼.. 해발 1천미터 정도 되는, 고지대에 위치한 요새였습니다. 그 당시에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래에서부터 산을 타고 올라가서, 적군과 싸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단 무기와 식량을 가지고 올라가야 하니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을 것이고..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복병이라도 있었으면, 몰살 당하기 쉬운 것입니다. 십중팔구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인 것이지요. 설령 성읍을 함락시킨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입지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칫 상처뿐인 영광을 얻었을 뻔한 전쟁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전쟁에 임했기에,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물결 치듯 약간씩 변동이 생겨도, 최소 은행 이자보다는 꾸준히 상승 곡선을 타기 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때로 세상의 유혹과 핍박 때문에 요동을 쳐도, 시간과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성장하길 바라시는 것이지요. 지금 사사기 1장의 상황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유다 지파가 가나안 원주민들을 상대로 맞붙어서 엄청난 쾌거를 이루었고.. 베냐민 지파가 약간 주춤하기는 했지만, 요셉 가문이 함께 힘을 모아서.. 다시 상승 곡선을 만들어 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 지파나 요셉 가문과 같은 승리를 거두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믿음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인 것이지요. 신앙의 연차나 직분에 상관없이.. 믿음이 좋고 굳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약한 사람도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온전한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12지파 가운데.. 무려 10지파가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고.. 한 번 이기고, 한 번 비기고.. 이런 식으로 반타작만 되더라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한 지파 이기고, 한 지파 지지부진하고.. 한 지파 이기고 까지 좋았는데, 그 이후엔 계속 제대로 된 힘을 못 쓰니..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등의 지파가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에 함께 거주하게 된 것이지요. 심지어 단 지파의 경우엔, 오히려 아모리 족속에게 역공을 당해서.. 비자발적으로 산지에 거주하며, 산 아래로 내려올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힘이 좀더 강성해 졌을 때.. 그들을 노예나 종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 부분에서.. ‘그들을 모두 쫓아내거나 진멸시키는 것보다, 노예로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승리를 거둔 것이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명기 7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가 너희 중에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진멸하여라.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준행하지 못했던 탓에.. 나중에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시면, ‘양은 냄비’가 생각납니다. 첫 시작은 무언가 불타올라서 가장 강력한 원주민들을 몰아내기까지 했는데.. 어느새 불이 꺼지고, 식어 버려서.. 차갑게 된 냄비처럼, 맥 빠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진행될 사사기의 상황이 얼마나 안 좋게 될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의 전반적 분위기처럼.. 사사 시대의 역사가 한심하고, 답답하고, 안타깝게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르거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해서입니다. 1장 1절에서 유다 지파의 승리 비결은, 여호와께 묻고 응답받은 대로 했기 때문이고.. 22절에서 요셉 가문의 승리 비결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외 다른 지파들이 했던 전쟁에서는.. 이와 같은 표현이 등장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 나름대로 했다가, 잘 안 되니까 포기해서 그런 것이지요. 내 식대로의 신앙생활.. 그것은 우리가 가장 경계 해야할 태도입니다. 바라기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서.. 승리와 평안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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