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6일 (새 205장 / 주 예수 크신 사랑)
서론
같은 물건이라도.. 누구 손에 들려 있느냐에 따라서, 기능과 활용도는 천지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세계 일류 셰프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은..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황홀함마저 느껴지는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 냅니다. 어머니 혹은 아내가 사용하는 칼에서는, 조금은 투박해 보이지만..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성스러운 음식이 나오게 되지요. 그런가 하면, 도축업자가 손에 칼을 잡았을 때.. 우리의 식탁 위에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육류가 올라올 수 있게 합니다. 최대한 고통 없이 가축들을 죽여서.. 각 부위별로 알맞게 잘라내지요. 하지만 악한 사람들이 손에 칼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약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칼이지만.. 누가 들고 있는가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게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자녀들은 누구에게 붙들려 있습니까? 바라기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셔서.. 세상의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시험당하지 않고, 주께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과 진화론자들이 부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중세 시대에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라는 주장을 했었지만..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진리는 결단코 변하지 않는 법이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진리를 감추려 하는 것은,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주권 아래에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설계자와 진행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손에 막대기가 있든.. 몽둥이가 있든, 무엇이 들려 있든 간에..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용자의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쓰임을 받고 못 받고를 따져서.. 그것으로 자랑거리나 안정감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지만,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만 사용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은 그런 편협한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지 못 할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일찍이 애굽을 사용하셔서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북 이스라엘의 극심한 우상 숭배를 심판하시기 위해 앗수르를 통해 멸망시키셨던 것도.. 제사장 국가로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남 유다를 바벨론이 정복하게 하셨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과도하게 남 유다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그 이후에 새로운 나라를 못 일으키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그 일을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이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정복 당하고,, 포로로 잡혀오기까지 했던 유다 백성들이, 자유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전지전능성.. 하나님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안목.. 이러한 부분들을 잘 알고, 평상시에 갖추고 있다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몰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까지도 태워버릴 것만 같은 불 앞에서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물 가운데서도.. 심지어 하나도 남김없이 날려 보낼 것 같은 바람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되고, 그분의 명령을 준행하고 있다면.. 평강과 공의가 우리를 둘러칠 것입니다. 그 무엇에도 진멸하지 않고.. 오히려 바닷가의 모래처럼, 밤하늘의 별들처럼.. 흥왕하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인자와 자비가 무궁하시고..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소견에 따라 행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그분 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경험이 없기에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의 목적과 관심은 항상 구원에 있으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섬겼을 때에도.. 광야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중에,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할 때에도.. 심지어 가나안 땅 정탐 후에,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장관을 한 명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매번 진노하시고.. 징계를 내리셨던 것만 같은데, 어떻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몇 번이나 진멸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을 통해 잘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시내산의 금송아지 사건 때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서 ‘내가 저 산 아래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죽이고, 너를 통해 새로이 나라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던 적도 있으셨습니다. 모세가 만류 덕분에 최악의 사태를 면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굳이 멸절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후에 사사 시대 때에나, 왕정 시대에도.. 하나님을 떠나 각자의 소견대로,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손을 놓으셨을 수도 있으셨지만, 끝까지 구원하셨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가 그나마 거룩하고 잘 살고 있을 때에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바닥에 있을 때.. 우리 자신의 더럽고 추악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그때에.. 구원을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사야 본문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이 부분에서, 선민 백성이라 하는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조건이나 행위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얘기는 곧, 회복과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용하시던지.. 회복과 구원이 언제 임하게 되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은혜가 언제 오든.. 마냥 기다려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질 때까지 누워있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주님 앞에 간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막을 평지처럼 다니게 하시고..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 그래서 온 세상 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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