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7-14 '각자의 최선'
2022년 6월 15일 수요예배
서론
며칠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하는 우주 탐사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바로, 달 탐사선 ‘다누리 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7월초에 미국으로 이송되어서.. 8월 3일 즈음에 발사하면, 12월 중순 정도 달에 도착해서.. 1년 가량 탐사한다고 합니다. 이 일이 성공하게 되면, 세계 2백여개가 넘는 나라 가운데, 7번째로 우주선을 달에 보내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주 강국과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내일은 우주선 발사체 누리호 2차 발사 시험이 예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30여년 전에 우주 산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러시아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대부분 순수 우리나라의 기술로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질만 한 일인 것이지요. 어찌됐건.. 지구 밖으로 보내는 것이다 보니, 한 대의 우주선을 제작하는 데에 수 백만 개의 부품이 필요합니다. 다른 기기들과는 달리, 하나라도 대충 조립된 것이 없습니다. 완성이 되면, 몇 번의 정밀 테스트를 거쳐서 지구 밖으로 쏘아 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간혹, 수 백.. 수천억이 투입된 우주선이, 발사대나 지구 대기권을 통과하기 전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불안정함이나 결함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수 백 만개의 부품들이 제각기 맡은 역할들을 잘 해냈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조금이라도 에러가 발생하면, 재정적 손실과 함께.. 그동안의 수고와 헌신이 아쉽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기에,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몸된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는.. 각자 맡은 바 직분과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본론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막바지에 일어난 에피소드입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마지막 전도 여행이었으니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에베소에서..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아볼로를 만났습니다. 바울과 동행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욱 정확하게 풀어줍니다. 그래서 떠돌아다니며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를 전했던 아볼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게 되지요. 복음 전도자로서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아볼로에게 있어서는 삶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이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 지방을 다니면서,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도록 합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하며 권면하던 시기도 바로 3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사역으로 인해서 19장 10절 말씀에 보시면,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바울을 통한 성령의 역사들이 너무도 크게 일어나서, 바울이 몸에 지녔던 것을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마술사들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면서 악귀를 쫒아내기도 했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이와 같은 일을 따라하다가, 악귀로부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이 나기도 했던 사건이 있었지요. 심지어 에베소에서는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모든 마술 서적들을 불사르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바울과 관련해서 엄청난 성령과 부흥의 사건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면서부터 이방인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교 사역 초기 때부터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3차 전도여행의 중반을 넘어선 이후였던 것이지요. 악귀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일반 세상 사람들에게도 알려질 정도로 큰 사역이 일어났을 만큼.. 1,2차 전도여행에 비해 엄청난 성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좋아, 이제 이 지역에 교회를 세워서 목회를 해야 되겠다. 많이 부흥시켜서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해야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소견에서 비롯된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어느 정도의 안정된 사역과 함께 명예를 얻을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바울은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 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 기지 아니하노라’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지만,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는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는 것이지요. 바울도 인간이고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예수님 믿기 이전이었다면.. 다른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루살렘에만 머물며 ‘호의호식’ 했겠지요. 하지만, 회심한 뒤에..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다할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땅 끝까지 가서라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로마에 가는 것은 바울의 목숨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기에,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가 죽을 수 있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피할 길을 주신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부르심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성령에 인도되어 로마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시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 이후의 말씀들을 보시면, 가는 여정 가운데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지역들과 교회를 위주로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권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지럽고 혼돈스러운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믿음의 반석 위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세워 나가는 것이지요. 믿음의 동역자들에게는 자신의 비전과 지나간 삶을 나누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생에도 마지막 때는 올텐데.. 바울의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장기적인 비전을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이.. 바울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에 생긴 일입니다.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인 빌립이 교회를 세운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인 것이지요.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유대에서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 한명이 내려옵니다. 그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당하게 될 일에 대해서.. 예언적 상징 행위를 통해서 가르쳐주게 되지요. 물론 가이사랴에 오기 전, 두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21장 4절에 보시면,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을 받고, 사람들의 만류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이젠 정말 마지막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바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바울아,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도 괜찮겠니? 다른 곳으로 가도 괜찮아.”라고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죽음의 장소로 몰아넣고,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감사한 줄 알고 가려무나.”라고 쌀쌀맞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두 차례의 사건을 통해서 어떠한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아무리 바울이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앞일에 대한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할지라도, 약간은 “그래도 설마...”하는 생각이 마음 한쪽 구석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동안의 성공적인 사역으로 인해 ‘긴가민가’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 중에 끊이지 않았던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에 가서도 어느 정도는 계속해서 이어지게 될 거라는 약간의 기대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도 인간이기에,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지는 않았겠습니까? 바울의 마음이 흔들려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복음이 더욱 확장되었을 것이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그냥 가이사랴에 남아있거나 다른 지역으로 가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지금까지 사도 바울에 집중해서 말씀을 나누기는 했지만, 오늘 본문을 보시면.. 각자의 자리와 위치에서, 열심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선지자 ‘아가보’입니다. 아무리 선지자라 하더라도.. 부정적인 예언을 직설적으로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이렇게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극악무도한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심판 메시지는 주저함 없이 선포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상황이 다른 것이지요. 모여있던 사람들은 동역자들이었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을 대상으로.. 장차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자칫 상대방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또는 마음의 상처나 시험을 들게 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듣기 좋은 말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격이 이상하거나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비록 뒤돌아서는 험담이나 악담을 하더라도.. 일단 당사자 앞에서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비슷했습니다. 구약의 왕정 시대 때.. 나라가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있을 때, 많은 선지자들이 활동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했던 선지자들은 많지 않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합 왕이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고자 했었던 때가 그러했습니다. 선지자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자는 여호사밧의 요청에.. 아합은 4백 명의 선지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합 왕의 계획에 동조했습니다. 그와 같은 거짓 예언을 했던 이유는.. 세상적 욕심으로 사탄에게 미혹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왕과 백성들에게 잘 보여서, 더 많은 권력과 경제적 유익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만이.. 그 계획이 실패하고, 왕이 죽게 될 것임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비단 미가야 외에도.. 사무엘, 나단, 예레미야 등은 대상이 누구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선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신 것이지요
자신의 소임을 열심히 감당한 두 번째 그룹은, 바울의 동역자들과 가이사랴의 성도들입니다. 아가보가 전한 메시지를 함께 들었을 때.. 그들이 보였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말씀합니다. 아가보의 부정적인 예언을 듣고.. 바울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열심히 뜯어 말렸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자신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사명이고, 인생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알아서 하겠거니..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보호하실까 생각하며 관망하지 않은 것이지요. 사도로서.. 믿음의 동역자로서.. 또한 복음의 일꾼으로서, 그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더 오랜 기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길 바라는 마음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지 않도록 만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바울을 붙잡는 행위에 대해.. 그의 마음을 약하게 해서, 사역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은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듯이 ‘주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한 것이지요. 이때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왕으로 생각했고.. 그리 되었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세상적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서가 아니라.. 불순한 의도로 만류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가이사랴에서 함께 모여있던 동역자와 성도들은.. 순전히 바울에 대한 애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일부러 가시밭길을 가지 않도록 붙잡았던 것이지요.
끝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던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숱한 고생을 하며, 부르심을 따라갔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영광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 왔는지..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서 27절까지에 잘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태장으로 세 번, 돌로 한 번 맞고.. 세 번 파선해서 일주일을 깊은 바다에서 지내고.. 강, 강도, 동족, 이방인, 도시와 광야, 바다, 거짓 성도로부터 위험을 당하고.. 숙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고백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을 겪어온 바울에게 주신 말씀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많은 수고를 하였고.. 그에 따른 상급을 주겠노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중된 고난에 대한 말씀이었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계속되는 고난과 어려움에.. 회의감이 생길 것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잘 가고 있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에게는 그러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사람들의 만류와 점점 더 확실하게 보여지는 부정적 미래의 상황에 대해서도, 아무런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일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가 전한 복음과 신학적 메시지 때문에 그렇게 했었겠습니까?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겠지만, 모두 아닙니다. 가시밭길과 다름없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음을 알았어도.. 바울이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본문 13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처음에는 예수님께 죄송하고 미안해서 열심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잠깐이었을 것이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케’ 하고자 하는 열정과 사명으로 가득차 있던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지요.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마다 얼굴의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과 취향이 다르듯이, 각자의 달란트와 은사도 다릅니다.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어도.. 각 신체 부위와 기관마다 역할과 기능이 다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셨지만, 각자가 드러내야 할 최선의 모습은 서로 다를 것입니다. 직분과 위치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각자 최선을 다할 때 다 하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전제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부서와 맡은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기관과 사역들이 중요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할 때에, 우리 교회는 보다 건강한 교회..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